[문화마당]다문화를 생각하는 시간/신동호 시인

추위가 매섭다. 이른 아침 지하철을 타러 가는 짧은 거리, 벌써 이부자리에 남기고 온 온기가 그립다. ‘이런 추위 속으로 옛 인류들은 어떻게 걸어갔던 것일까.’ 어깨 위로 내려앉은 한기에 몸서리치며 지하철역으로 달려간다. 끊임없이, 제도화되고 안정된 삶 속에서도 이동하는 사람들. 그들의 틈에 섞여 몸 안의 세포들이 출렁인다. 참으로 신기하다. 매번 같은 시간의 지하철임에도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등과 등이 부딪치며 그래도 우리는 함께 간다.

▲ 신동호 시인

온풍이 하늘 가득한 초원에서 어느 날 북쪽으로 발길을 옮겼을 인류의 조상 누군가를 생각하는 동안 지하철은 종착역에 멈춰 섰다. 그는 왜 추운 곳으로 갔을까? 인천으로 가는 1호선 환승역에서 동남아인들의 낯선 언어가 들린다. 한국의 겨울바람에 조금은 익숙해진 모양이다. 하얀 입김을 내면서 방향을 잘 잡아 줄을 선다. 이 땅은 과연 저들에게 고향을 떠나올 만큼 평등하게 기회를 주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들은 왜 투명한 바다와 낙천적인 문화의 공간을 떠났을까?

어린 시절 나는 미군 부대가 주둔한 소도시에 살았다. 초등학교 교실 한 반에는 늘 한두명의 혼혈친구가 있었고 그들은 한 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전학을 갔다. 멀리 아버지의 나라로 갔다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도시의 부대로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남아 있는 꼬마들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주소를 받아뒀거나 집에 놀러 가봤거나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친구가 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너무도 낯선 얼굴이었다. 철들어 생각해보면 아쉽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들도 그저 철부지들에 불과했을 터인데, 얘기를 나눠본 기억조차 없다.

대제국 몽골의 힘은 문화의 평등한 수용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의 궁궐에는 터번을 쓴 총리가 있었고 다른 언어들이 뒤섞여 재주와 능력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미국 뉴욕이 가진 창조의 힘 또한 다양한 인종들이 가진 문화의 흡수력에 있다. 유대인들의 가게에서 철저하게 정리된 전자제품을 사고 태국인의 가게에서 매운 해산물요리를 먹는 동안 뉴요커들은 배척보다는 수용에 익숙해진다. 뉴욕이 신진 아티스트들의 천국인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창조적 문화는 융합 속에서 탄생한다.

 

대학로에서 만나는 몽골 사람들의 좌판, 배를 채우러 온 인도인들 틈에 혼자 앉아 카레를 먹는 아가씨, 차이나타운과 중국인들의 축제, 필리핀 아내와 베트남 엄마. 조금은 익숙해진 이런 풍경들에 좀 더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갈 일이다.

날씨가 추우니까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가지라고? 아니다. 기회를 찾아 우리에게 온 그들을 평등하게 대하라고?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많아진 이주민들과 다문화가정은 우리들의 기회를 의미하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문을 꼭꼭 닫아놓고 살던 우리들에게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을 주는 것도 그들이요, 그런 문화와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의식을 제공해주는 이들도 그들이다. 평화와 공존이란 이념교육이 아니라 일상을 통해 훈련되는 것이 아닐까.

대륙 사이를 오가는 교통수단과 더불어 세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만나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그러나 환경에 적응하고 문화에 익숙해지는 시간은 아마도 걷는 속도에 맞춰져 있었을 터, 나와 그들이 ‘우리’가 되는 시간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문득 다가와 있을 것이다. 다문화가정의 소녀가 한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인도 자이나교의 비폭력과 힌두교의 다양성을 배운 소년이 노벨평화상을 받고, 이맘때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된 베트남 엄마에게 감격의 심사평을 들려주는 대가들….

춥다. 1호선이 좀 늦다. 사람이 그리워진다. 가족이 멀리 있고, 친구들조차 곁에 없다면 그가 누구든 나는 그와 함께 온기를 나눠야 살 수 있다. 추운 곳으로 발길을 옮긴 인류의 조상 덕분에 우리들에게 그리움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동남아 청년과 눈인사를 나눴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춥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서울신문 (2011년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