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200만명 시대  ‘나그네와 가난한 자 사랑하라’ 말씀 따라 실천

<중> 이주민을 섬기는 크리스천들


[이주민 200만명 시대 <중>] ‘나그네와 가난한 자 사랑하라’ 말씀 따라 실천 기사의 사진
안대환 목사가 최근 경기도 광주 한국이주노동재단을 찾은 스리랑카 노동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최근 경기도 안산이주민센터에서 만난 박천응 목사가 ‘국경 없는 마을(박 목사가 조성한 안산 원곡동의 동네 이름)’ 지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경에는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수없이 등장한다. 최근 경기도 광주와 안산에서 차례로 만난 두 목회자는 이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경기도 광주시 한국이주노동재단 이사장인 안대환(55) 목사와 안산이주민센터 대표 박천응(54) 목사가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이주민 사역을 하며 목회자로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주민 사역은 나의 천직” 

안 목사가 있는 한국이주노동재단은 광주 경안시장의 한 허름한 상가건물 2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231㎡(약 70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는 한글수업이 한창이었다. 외국인 30여명은 강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부정부사 ‘못∼’ ‘안∼’을 활용해 부정문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공간 한쪽에 있는 이사장실에 들어섰을 때 맨 먼저 눈에 띈 건 테이블 아래 놓인 쌀부대였다. 12㎏짜리 쌀부대가 12개나 쌓여 있었다. 재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외국인 40여명의 ‘식량’이었다. 안 목사는 “양이 많아 보이겠지만 이 정도로는 한 달도 버티기 힘들다”며 말문을 열었다.

“한 달 전기세가 100만원 넘게 나올 때도 있습니다. 후원을 받고 사비까지 탈탈 털어가며 버텨 왔어요. 힘들 때가 많지만 이 일을 계속하는 건 보람이 크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도움이 이주민들에겐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게 하는 힘이 되니까요. 이주민 사역은 저의 천직입니다(웃음).” 

안 목사가 처음부터 이주민 사역에 나선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그는 서울과 성남 등지에서 목회를 하던 평범한 목사였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90년대 중반,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돌아와 교회를 개척하면서다. 하루는 나이지리아 출신 노동자가 교회를 찾아왔다. 따뜻하게 맞아주자 이 노동자는 친구들을 하나둘 데려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교인’은 어느 순간 40명을 넘어섰다. 

“외국인이 늘자 ‘내국인 교인’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외국인에 대한 편견 탓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분이 많았죠. 흑인이 많았는데, 흑인 특유의 냄새를 싫어하는 교인도 있었고요.”

안 목사는 내국인 목회를 접기로 결심했다. 98년 5월 공장 건물을 개조해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를 만들어 이주민 선교에 뛰어들었다. 센터가 노동부 산하 재단법인으로 바뀐 건 2008년이다. 현재 법률상담 등을 받기 위해 재단을 찾는 외국인은 매달 1만5000명이 넘는다. 안 목사는 이주민 권익 향상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법무부가 주최한 ‘제6회 세계인의 날’에 대통령상도 받았다. 

“선교의 모토로 흔히 거론되는 슬로건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자’는 거잖아요? 그런데 땅끝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이주민이 바로 땅끝에 살던 사람들이니까요. 땅끝이 바로 지금 우리 앞으로 다가와 있는 거죠. 한국교회가 이주민에게는 무관심하면서 해외선교에 몰두하는 건 잘못입니다.” 



“한국교회, 다문화 사회에 걸맞게 바뀌어야” 

안산이주민센터에서 만난 박 목사는 이주민 선교에 뛰어든 계기를 묻는 질문에 92년 어느 봄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그는 안산 원곡동 주택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에서 온 한 청년이 그를 불렀다. 청년은 길을 몰라 우두망찰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박 목사는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하고 안산에 교회를 개척한 지 2년 밖에 안 된 ‘초보 목사’였다. 당시 그는 ‘왜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할까’ 고민하며 심한 회의감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동남아 청년이 저와 다를 게 없더군요. 동병상련을 느꼈죠. 그 청년을 만난 뒤 외국인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제가 가야할 길이 바로 거기에 있더라고요.”

94년 그는 국내 첫 이주민 NGO 단체이자 안산이주민센터의 전신인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설립했다. 이곳은 임금이 체불되고 각종 산업재해로 신음하는 이주민의 사랑방이자 쉼터 역할을 했다. 박 목사 이름 앞에는 언젠가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박 목사는 2013년 인하대 대학원에서 다문화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다문화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례는 국내에선 처음이었다. 박 목사는 논문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국가 주도의 다문화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로 바뀌었는데 교회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새 신자를 길러낼 때 활용하는 교육 콘텐츠는 철저하게 내국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내국인 목회에만 안주할 경우 유럽교회들이 그러하듯 한국교회 역시 쇠락할 거예요.” 

2000년대 중반, 법무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서 박 목사는 ‘반한(反韓) 활동가’로 지목됐다. 정부가 불법체류 이주민을 보호하는 그를 얼마나 마뜩찮게 여겼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법을 어겨가며 잔인하게 불법체류자를 솎아내는 정부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광주·안산=글·사진 박지훈 기자